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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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일제강점기 보통학교 시험문제지 4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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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포로감시원 참전 실화 연극,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7월 개막"1942년 5월, '매일신보'에 군속 채용 선전 기사가 실렸다. 지원 자격은 일본어 사용 가능자, 보통학교 졸업자 이상의 학력자란다. 집안의 기둥인 형님과 어린 아우들을 전장으로 보낼 수는 없다. 급여도 많이 주고 2년 근무 만기라는데, 집안을 대표해 내가 다녀오는 것이 맞겠지."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한 연극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가 7월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중구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 오른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는 스무살 무렵의 최영우가 일제 치하 일본군 포로감시원으로 참전하여 겪었던 실화를 적은 것이다. 그의 육필원고를 외손자가 발견하면서 종이책으로 나오게 됐다. 이 작품은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라는 공연 형식의 독창성을 인정받아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과 기술융합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으로, 원작의 내용 중 주인공 최영우가 전쟁 종료 후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전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전범 재판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극 중 최영우의 직책인 포로감시원은 아직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자 중 하나로, 작품은 당시 최영우가 겪어야 했던 고뇌와 후회, 체념을 통해 참담한 역사의 파도 속에서 그 어떤 이름도 남길 수 없었던 무명의 조선인 청년들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극은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버린 그들이 느꼈을 억울하고 복잡한 심경에 공감하며 새로운 시각과 해석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의 제작을 맡은 극단 ‘예술창작공장 콤마앤드’는 이머시브 시어터를 비롯한 장소 특정형, 관객 참여형 연극 등 장르의 한계를 벗어나 작품을 창작하는 단체로, 이번에는 실감콘텐츠 개발 전문 프로덕션이자 영화제작사인 ㈜파란오이와 합작해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형식을 관객들에게 소개한다. 무대로 옮겨온 작품은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라는 형태로 선보인다. 연극과 영화가 융합된 장르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기존 형식과 이들의 모습을 사전 콘티와 편집을 통해 실시간 재구성해 스크린으로 구현하는 영화 형식을 결합했다.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과 기술융합 지원사업에 선정됐다. 2022년 브런치ⅹ밀리의 서재 전자책 출판 프로젝트에서 130:1의 경쟁을 뚫고 선정된 르포르타주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가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관객들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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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명무, 호남살풀이춤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게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051026cholsun4.jpg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 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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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2)김종욱 조선영화로 제1회 작품 "春香傳”이 나온지가 벌써 12년 전이다. 이것을 조선영화의 제1 페이지로 친다면 조선영화는 벌써 열두 살 먹은 소년이 된 세음이다. 열두 살이면 보통학교 5학년생이다. 젖 먹을 시간은 벌써 지냈 건만은 우리는(조선영화계) 아직까지 어린애 對接을 받는다. 어린애에도 不具兒로 세상에서는 對해 준다. 曰 補償없는 事業, 이것이 우리들이 듣는 別名이요 세상이 우리들에게 주는 評價다. 이렇게까지 된 根本原因을 세상에서는 거의 우리들의 當事者들에게 돌리는 것 같다. 물론 그 책임의 일부를 우리 영화 제작자가지지 아니하려는 것은 아니다마는 책임 전부가 우리에게 있지는 않다, 이렇게까지 된 제일 중대한 원인이 商品市場이 極히 작았기 때문이다. 조선 내 常設舘이 16處요 三流 四流劇場까지 치면 舘 數가 68舘, 여기서 볼 영화는 1편이다. 돌아오는 時日이 12個月, 보통 작품으로 總收入이 3천원, 特作品으로 5, 6천원, 이것이 無聲時代에 우리들이 제작한 物件이 가지고 있던 市場이다. 이 작은 시장에서 出資主는 受入이 2, 3倍되는 利益을 얻으려는 小 興行師가 아니면 興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映畵館(돈 있고 일을 모르는)이 아니면 장난꾼들이었다. 그러므로 2, 3배에 이익을 목적하는 소 흥행사들은 3分之 1以上의 出資를 아니해줬던 것이요, 장난꾼들은 受入을 無視한 倍額이 제작비로 2回를 編成하지 못하고 亡해버렸다. 이런 出資主를 상대로 하는 사업이 사업답게 될 배도 없고 달리 外國市場으로 보낼 물건이나 있을 리도 없다. 더구나 외국영화로나 남이 高級해지는 觀客을 상대로 하는 조선영화가 必然的으로 닥쳐올 큰 문제가 오고야 말았다. 조선영화면 또 그렇겠지. ‘렛쭈’ 몇 장으로 太陽光線을 빌려서 겨우 보일 락 말락 한 畵面을 보기에 싫증이 났다. 더구나 무성영화도 아작 水準까지 끌고 가려면 千里길이나 남았는데 외국영화는 發聲이 완전히 되었다. 이 커다란 문제 잎에서 조선영화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우리도 한 개의 저선영화인으로서 이에 應戰할 準備가 具備하게 되었으니 다만 勝敗는 技藝의 문제다. 外國物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물건을 만들면 외국의 시장도 우리의 시장이다. 今後에 조선영화는 ‘레푸’ 쪽으로 만들면 장난깜이 아니다. 영화로써 이 모든 形式을 具備한 물건만을 내놓을 것이다. 새 活氣를 띈 36年度의 조선영화계는 커다란 收穫이 있을 것이다. 絶望의 無抵抗에서 再生을 얻은 조선영화를 등에 지고 나갈 동무들에게 건강을 빌면서 擱筆한다. =朝鮮中央日報 1936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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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성 인물사] 국악발전의 어머니 박귀희국악발전에 모든 것 희사 2011년 11월 3일 인구 11만의 경북 칠곡에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다 모여들었다. 2011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1921.2.6~1993.7.14) 명창 기념공연 「국모」에 출연하기 위해 선생의 후배, 제자, 국립전통예술학교 재학생,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천리길을 마다 하지않고 내려온 것이다. 20세기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악의 어머니를 기리는데 두 마음은 없었다. 국악계의 은인을 위해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창설자를 위해서, 바쁜 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기꺼이 내려온 것이다. 향사 박귀희는 어떠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문화예술계의 크고 다양한 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양악에 밀리는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또 소외된 여성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부한 여장부다. 가히 국악 발전의 어머니 역할을 다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적통이 아닌 서얼 출신에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국악학교 설립이라는 소망을 세웠고, 그 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참인간이다. 박귀희는 한국의 혼이 담긴 국악을 사랑하고 키운 우리나라 국악사의 빛나는 스승이다. 여성이지만 국악인으로서의 민족음악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전무후무한 경북여성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과 6·25를 지나오면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릴 새로운 시작은 국악뿐이라는 것을 박귀희 명창은 이미 알았던 것일까? 박귀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소리를 들으면서 넋을 잃었고, 그 가락을 잡으려고 소리판에 들어섰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뛰어난 선택이 우리 국악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났다.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 되어도 국악인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는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악은 선풍적으로 확산되었고 국악은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양악이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 온 국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낼 듯 확산되어도 국악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해방 나흘만인 1945년 8월 19 일에 대동단결하여,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인들은 희망에 부풀어 국악중흥운동을 펼쳤으나 냉대받고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은 달랐다. 장택상은 박귀희의 친아버지 장병관과 한 집안으로 국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것으로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 교장 기산 박헌봉은 『국악운동 반생기國樂運動 半生記』에 적고 있다. 여러 해 외국생활을 했던 장택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고, 우리 국악같이 흥겨운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국악을 사랑했다. 창랑의 도움으로 박귀희는 국악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감상회를 열었다. 이때 박귀희, 김소희 명창의 판소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저녁 감 상회를 계기로 국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학교설립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대 내각도 외면하고, 6·25도 터지면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세우다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이사장 박귀희는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서울 돈암동 적산 가옥 7백평을 불하받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무용과 기악, 창 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이 사립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다. 3 년동안 약 380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 삼양 사 김연수, 경성방직 김용완 사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윤병호 서울은행장,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건평 5백평 규모의 신축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0년 3월 5일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교한 사립 국악예술학교는 5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로 그 중요성을 지닌다. 1964년 4월 15일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의 호의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남산으로 이전하였 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사무실로 쓰던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나 규모가 한결 나았고, 주변 민원의 소지도 줄었다. 그해 7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 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1968년에는 돈화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0년 9월 30일 서울 석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4년 12월 17일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2년 10월 29일에는 석관동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번 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2002년 3월 2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지정 자율 학교가 되었다. 전통예술학교는 박범훈, 김성녀, 김영임, 오정해 등 걸출한 졸 업생들을 배출한데다 국악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8년 3 월 1일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국악예술학교가 1970년에 서울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박귀희는 운동장이 없 는게 마음에 걸려 1989년 서울 운니동에 있던 자신 소유의 운당여관을 국악예 술고등학교 이전 비용으로 내놓았다. 석관동 교사 판매 대금 20억원에다 박귀 희 명창이 살던 사저 운당여관 그리고 명창의 대전 과수원까지 판 전 재산 38 억원으로 전통국악예술학교는 1992년 금천구 시흥2동의 넓은 땅으로 이주하 게 된 것이다. 전통예술학교가 넓은 교사로 옮긴 것은 더없이 축하할 일이나 서울의 전통 숙박시설 명소로 사랑받던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이다. 박귀희 명창의 고택이 된 운당은 척박하던 195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국수전이 열리던 바둑 대국장이었다. 운 당이 박귀희 명창의 소유가 된 것은 1951년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때 궁중 내 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받아 지은 양반 가옥이었다. 여기에 구한말 세 도가였던 한상억이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구름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으 로 이름지었다. 서울 경기지방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는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져있고, 박귀희는 이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운당여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이자, 한국가옥의 곡선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 다. 198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악예술학교에 기증된 후 헐렸던 운당여관은 1994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서울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다. 국모 박귀희 명창이 기산 박헌봉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보듬고 민족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뿌린 씨앗은 이제 개교 반세기를 넘어 반만년 민족정서를 싣고 있는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국악교육기관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에서는 향사 박귀희의 예술관이 실천되고 있다. 박귀희는 예 술을 공부하려면 먼저 인성을 닦고 예능을 공부해야하며, 예술인은 기예 뿐 아니라 학식도 겸비해야한다고 강조하였고 몸소 실천하였다. 박귀희 명창의 국악살리기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시작되었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악에 는 없던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자유의지의 발로이자 전 인미답의 신개척지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리로 풀어내야 할 출생스토리 박귀희 명창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영심으로 친아버지는 장병관, 인동 장씨 집안이다. 장병관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잘하며 돈도 많았다고 한다. 알아주던 대농이었던 칠곡 갑부 장병관이 경영하던 술 도가는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장병관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아랫 마을 속칭 탑고개에 살던 큰 무당 박금영(박귀희의 친어머니)과 동거했다. 장병관은 박금영이 딸을 낳자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딸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으로 사는 삶의 지난함을 알고 있는 박금영은 처음에는 어린 박귀희 즉 장영심을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장병관은 혼인 외 딸이라고 해서 외면하는 바람에 박귀희는 인동 장씨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친모 박금영이 오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자 오씨 호적에 오계화라고 올렸으나 박귀희는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오씨 성을 따를 수 없다면서 어머니 성을 따랐다. 상당히 앞서서 주체적인 생각을 보인 셈이다. 이후 장영심 즉 오계화는 국악에 입문하면서 지은 귀희라는 예명에 어머니 박씨 성을 붙여서 박귀희가 되었다. 한국 국악계의 대들보 역할을 한 명창 박귀희의 이름 세 글자에 출생에 서린 애환과 신분 차별의 굴레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간승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는 가야금과 무관하지 않은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박귀희는 능력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나, 축복받는 출생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자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태어난 박귀희의 인생 고민과 고뇌는 일찍 싹텄을 것이며, 그것이 깊은 예술적인 공명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어찌보면 박귀희와 국악과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닐곱살쯤 철이 들만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봉산동 외가로 보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무성영화를 처음 접하였다. 이때부터 예술세계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향토음악사를 정리한 손태룡은 박귀희가 대구에서 달성권번과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1931년 11세때 대구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자질이 움트기 시작했다. 박귀희는 권번 담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따라하다가 손재광 앞에서 단가를 부르게 되었다. 손재광은 그래 쓰겄다. 너 소리 배워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 셈이다. 손재광이 어린 박귀희에게서 소질을 캐냈다면, 첫 스승은 박지홍이다. 박지홍으로부터 판소리와 「화초사거리」 등을 사사받았다. 박지홍은 나주 출신으로 명창 박기홍과 종형제간이었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다 박귀희가 데뷔를 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14세 때 달성권번 손광 재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이화중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화중선 (1898~1943)은 김초향과 더불어 그 시절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열일곱살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였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 고 홀리듯 집을 나가 장득주에게 판소리를 배운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을 지닌 여류명창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에 이어서 일본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1943년 재일동포 위문 공연 도중 별세하였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이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손광재가 박 귀희를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다. 박귀희의 소리를 들어본 이화중선은 바로 입단을 허락하였다. 박귀희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것은 1934년이었다. 대구극장에서 「소상팔경가」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대동가극단과 일년여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은 쌓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 병창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토막 판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명창이 되려면 제대로 소리를 배워야한다고 결심하고 대구로 내려온 박 귀희는 한국 소리계의 대부들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지홍에게 「춘향 가」와「화초사거리」,「보렴」,「편락」을 배웠다. 15세이던 1935년에는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고, 승무, 박전무, 검무, 살풀이 등을 김남수에게 일년간 배웠다. 16세 되던 1936년 여름에는 대구 화원 용연사에서 박기홍의 의발衣鉢을 받은 조학진에게 백일 공부를 하면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백일공부는 불가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듯이 암자나 절에 스승을 모시고 들어가 성음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국악인들은 이렇게 절에 들어가서 소리공부 하는 것을 흔히 도야陶冶라고 하고 소리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하듯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희 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국악에는 없던 가야금 병창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 불이익 가야금 병창 광범위한 사랑받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야금 병창대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하는 새로운 연주 방식인 가야금 병창에 대해서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 근에는 이런 일들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 동안은 가야금 병창은 금지된 예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금 병창은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창을 하며 가야금을 뜯는 병창은 마치 서양 아티스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처럼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귀희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가야금 병창은 국악계의 대표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18세에는 전남 담양에서 박동실 선생을 모시고 두 번째 백일공부에 들어가 「흥보가」,「심청가」를 배웠다. 박동실과 공부를 마친 다음해인 1939년 19 세 때는 유성준을 모시고 경북 하동군 쌍계사에서 세 번째 백일공부를 하면서 「수궁가」한바탕을 배웠다.3) 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으로 다시 들 어가려 했으나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떠난 터라 종합예술단체인 한양창 극단에 입단하였다. 이때가 17세인 1937년이었다. 스승인 오태석과의 만남은 한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시작되었고, 공부 장소는 봉익동 대각사 근처 익선 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년을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다. 오태석은 목청이 좋고, 판소리 한바탕을 가야금 병창으로 노래할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을 거쳐 임방울, 박초월 등과 함께 1943년 동일창 극단을 재창단하여 동일창극단 단장을 맡았다. 동일창극단은 창작창극 「일목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창작창극은 신파조에 창을 혼합한 형식으로 아직 창극다운 창극을 접해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창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일창극단의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박귀희는 남자주인공을, 박초월은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미모에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박귀희가 남자 역으로 분장한 선화공주는 대히트를 쳤다. 창극에서 여자가 남자역으로 출연한 것은 박귀희가 시초이다. 동일창극단은 서울 공연이 끝나면 계속 지방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였으나 광복되던 1945년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박귀희는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였지만 여창남역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에 국악학교 설립의 뜻을 품다 1945년에는 여성국극단의 효시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피임되어 활동하였다. 창립공연으로 「옥중화」 이후 1949년 2월에 공연된 햇님과 달님의 성공으로 여성국극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단 1년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고 뚜렷한 대중예술장르로 자리를 굳힌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 적어도 1950년대는 여성 국극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국극의 대유행으로 종래의 창극단들은 거의 사라졌다. 여성국극단이 초기의 음악극으로서 공연적인 성취보다 남녀간의 사랑 등을 확대하며 인기를 좇아 변질되자 박귀희는 여성국극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여성국극단은 1960년을 전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 외에 국립국극단을 더 두게 되었다. 박귀희는 국립국극단 창 단을 앞두고 자격있는 국극인을 양성하는 국극요원양성소 개설을 거론할 정도로 국극단 창단에 음양으로 기여를 하였다. 국립국극단은 1973년부터 국립 창극단으로 바뀌는데, 이때 박귀희는 단장(1980~1982)을 맡았다. 1960년대 들어 문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지자 박귀희는 일본 교포 위문공연 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생하며 살던 교포들에게 우리 음악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내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이런 심리적인 현 상을 박귀희는 잘 알아차렸다. 1961년 일본 거류민단장 박수정의 제의에 따라 동경에 무악원을 세웠다. 강사는 박귀희를 비롯하여 민요에 안비취, 가야금에 문경옥, 장고춤에 강문자, 민속무용에 이춘자 등 5명이었고 박귀희는 운영 대 표 겸 판소리를 가르쳤다. 동경 무악원은 무려 17년간이나 운영된 뒤 1979년에 문을 닫았다. 공연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 국으로 확대시켰다. 국내에서도 가야금 병창활동을 62회나 펼쳤다. 전통예술에 대한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박귀희는 제23호 가야금 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968년의 일이다. 어릴때부터 명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박귀희는 시대 변화에 대 한 이해도 빨라 민족음악의 새 장을 여는 흐름에 항상 같이하고 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효녀 심청」에 박귀희는 영화음악으로 참여하 여 「심청가」일부 대목을 불렀다.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 할 때까지, 호남세가 주류인 국악계에서 드물게 영남맥을 이어내었다. 평생 소리를 하면서 번 돈을 국악계의 앞날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박귀희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육과 민요수집 작곡 악보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는 도이다 박귀희의 소리는 1950년대에 취입한 유성기 음반부터 1993년 작고 직전에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까지 다양하게 남아있다. 박귀희의 자서전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따르면 60년대말부터 민요 채집을 구상했고, 이를 국악예술학교 교장이던 박헌봉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먼저 뜻을 맞추고,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은 전승민요를 문화재관리 국에 기증하였고, 박귀희는 1979년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게 되 었다. 50여곡이 실린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본이다. 종전까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구전심수口傳心授 방식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할 수 있는 교본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민요가 수들이 부르는 「꽃타령」,「뽕따러 가세」,「옹헤야」 등은 박귀희에 의해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예藝에 산다는것은 험난하다. 예를 도道로 닦기에는 더 힘이 든다. 그런 예 도의 길을 박귀희는 걸어왔고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소리꾼으로서는 동편제 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성준의 제자로서 동편제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가야 금 병창으로는 고종 때 가야금 명인인 박팔괘의 정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 어온 오태석의 제자로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여성국극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긴 박귀희 명창은 평생을 국악살리기에 투신했 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향사 박귀희 추모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덕수는 사람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다수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전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가능성을 보고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21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은 날이 갈수록 그 향기가 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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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살풀이 춤 최 선 명무"혼(魂)이 담겨있고 정신이 스며있는 춤을 춰야한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텅 빈 동작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고. 선생의 한평생 무용철학이기도 한 이 말은 곧 ‘춤의 기본과 본질을 알고 창작과 전통의 구분을 명확히 하면서 인간성과 도덕성이 바탕이 된 바른 춤, 바른 동작을 깊은 내면에서 이끌어 올려야 한다’는 춤의 대한 정신을 말한다. 전북 춤계에서 영원한 뿌리로 평가받는 호남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최 선 선생 ! 「이제 나는 한 사람의 춤꾼으로서 개인의 영욕에만 사로잡힐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나의 춤은 곧 나의 희망이요. 겨레의 희망이기를 소망하고 기원할 따름입니다.」고 고뇌 하면서 최 선 선생은 춤과 같이 지나쳐 버린 60년이란 긴 세월을 돌이켜 본다. 「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라고 선생은 전한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 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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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안내]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배뱅이굿〉예능보유자 이은관씨 별세"신명나는 소리, 100살까지는 해야죠" 소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선생 최근에도 자신을 찾는 무대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한 공연장 무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어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있다. "왔구나! 왔소이다. 불쌍히 죽어 황천 갔던 배뱅이 혼신이 왔소이다, 오마니!" 그 주인공. 80년간 '배뱅이굿'의 대가로 살아온 98세 명창 이은관 선생이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황학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으며 서울 황학동에서 아들(이승주)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빈소는 서울 성동구 한양대병원 영안실 2층 10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4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도 용미리 시립묘지이다. 이은관 선생은 1917년 11월 27일 강원도 이천에서 8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나온 뒤 철원고등학교 시절 마을 콩쿠르대회에 나가 ‘창부타령’과 ‘사설난봉가’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21세 때 철원에서 열린 국악 콩쿠르에서 민요부분에 1등으로 당선된 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해도 황주로 가서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서도소리 가운데 특히〈배뱅이굿〉에 흥미를 느껴 즐겨 불렀다.〈배뱅이굿〉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50년대말 그가 영화〈배뱅이굿〉과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음반활동을 활발히 하면서부터였다.〈배뱅이굿〉은 1900년경 용강군 출신의 김관준이 처음 불렀고, 그의 아들 김종조에게 전해졌으며 최순경· 이인수 등이 부르게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은관은 이인수에게 사사받았다. 해방 뒤엔 대한국악원 민요부에 속해 세월을 보내다 장소팔, 고춘자(高春子) 씨와 유랑 극단을 만들어 서민들과 울고 웃으며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 음반 취입, 영화 ‘배뱅이굿’ 주연, 라디오ㆍTV 출연 등으로 돈도 벌고 인기도 누릴 만큼 누렸던 그다. 미국, 일본, 베트남 등 명성만큼이나 해외 공연을 많이 다녔고 KBS 국악대상(1982년), 보관문화훈장(1990년), 2002년 제9회 방일영국악상도 탔다. 1975년부터 국악협회 이사로, 고문으로 활동했다. 〈배뱅이굿〉은 무가조(巫歌調)와 구슬프고 처량한 성조(聲調)가 많았는데, 그의〈배뱅이굿〉은 무대예술화되면서 무가조가 거의 빠지고 민요조(民謠調)가 강하며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사설과 창법도 새롭게 도입되었다. 또한 음탕한 내용이나 욕지거리 부분은 일부 수정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소리제를 이어갈 제자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배뱅이굿 예능보유자 김경배,전수조교 박준영, 박성현, 전옥희, 이상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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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판소리 "정선심 - 심청가 눈대목 : 곽씨부인 유언하는 대목 "일시 : 2003년 12월 2 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시민교육관 경업당 문의 : 063) 280-7000~1, 280-7006~7(공연기획팀) *정선심 ㆍ전남대 예술대 국악학과 졸업 ㆍ국창 송만갑 추모 전국판소리 경연대회 대상 ㆍ진남 전국국악경연대회 장관상 ㆍ광주 국악대전 명창부 우수상 ㆍ미국 알라바마주 ‘한국의 날’ 선포 기념공연 ㆍ호주 그리피스 대학 판소리 강좌 및 공연 ㆍ일본 천리대 초청 공연 ㆍ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ㆍ현재 광주시립국극단 단원 *고수 조세영 ㆍ광주시립국극단 단원 *해설 최동현(국산대 국문과 교수)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이신 성창순 명창 문하생들과 함께 합니다. 1.심청가 눈대목 : 곽씨부인 유언하는 대목 *성창순(成昌順) 명창 :1934년 전남 광주 출신으로 명창 성원목(成元睦)의 장녀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방창 하는 천재였다. 부친은 성창순의 장래성을 인정하고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보통학교를 졸업할 즈음 춘향가·흥보가·심청가 세 마당을 이수했다. 1954년 김연수ㆍ김소희ㆍ정응민ㆍ박녹주ㆍ정권진 명창에게 사사 하였으며, 강산제 심청가ㆍ김세종제 춘향가ㆍ박녹주제 흥보가를 완창하고, 수궁가․적벽가도 사사하여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섭렵한 명창이다. 판소리 뿐 아니라 서예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1966년 제5회 신인예술전 서예부 특선을 수상하였고, 1968년에는 국전 서예부에 입선하는 대단한 솜씨를 자랑하였다. 판소리 기량은 장족으로 성숙하여 1968년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고, 1978년에는 전주대사습대회에 참가하여 판소리 부문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또 1982년에는 제1회 KBS 국악대상, 1994년 화관문화훈장을 수상하는 등 여류명창으로서 그녀의 명성은 높아졌다. 1977년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졌고, 이어 1979년에는 춘향가 완창발표회를, 1981년 제1회 국악제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짐으로서 그 실력을 과시하였다. 성창순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1974년 재일거류민단 주최 광복 30주년 기념공연에 참여하여 일본 대도시 순회공연 및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에서 공연하여 우리 가락의 우수성과 국위선양에 이바지하였다. 전남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광주시립국극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심청가 보유자로 지정되어 후진 양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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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판소리 " 이지선 - 범피중류2003년 11월 25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시민교육관 경업당 문의 : 063-280-7000~1, 280-7006~7(공연기획팀) *이지선 ㆍ전남대 예술대 국악학과 졸업 ㆍ제주 민요경창대회 장원 (대통령상) ㆍ전국 국악경연대회 일반부 대상 ㆍ한국전통예술가무악 경연대회 종합대상(국무총리상) ㆍ호주 브리스벤 초청강사 및 공연 ㆍ프랑스 해양 엑스포 유치 사절단 ㆍ일본 외무성 초청 공연 ㆍ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전수자 ㆍ현재 광주시립 국극단 단원 *고수 한규복 ㆍ전남도립국악단 창악부 단원 *해설 류장영(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장)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이신 성창순 명창 문하생들과 함께 합니다. 1.심청가 눈대목 : 범피중류 *성창순(成昌順) 명창 :1934년 전남 광주 출신으로 명창 성원목(成元睦)의 장녀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방창 하는 천재였다. 부친은 성창순의 장래성을 인정하고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보통학교를 졸업할 즈음 춘향가·흥보가·심청가 세 마당을 이수했다. 1954년 김연수ㆍ김소희ㆍ정응민ㆍ박녹주ㆍ정권진 명창에게 사사 하였으며, 강산제 심청가ㆍ김세종제 춘향가ㆍ박녹주제 흥보가를 완창하고, 수궁가․적벽가도 사사하여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섭렵한 명창이다. 판소리 뿐 아니라 서예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1966년 제5회 신인예술전 서예부 특선을 수상하였고, 1968년에는 국전 서예부에 입선하는 대단한 솜씨를 자랑하였다. 판소리 기량은 장족으로 성숙하여 1968년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고, 1978년에는 전주대사습대회에 참가하여 판소리 부문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또 1982년에는 제1회 KBS 국악대상, 1994년 화관문화훈장을 수상하는 등 여류명창으로서 그녀의 명성은 높아졌다. 1977년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졌고, 이어 1979년에는 춘향가 완창발표회를, 1981년 제1회 국악제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짐으로서 그 실력을 과시하였다. 성창순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1974년 재일거류민단 주최 광복 30주년 기념공연에 참여하여 일본 대도시 순회공연 및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에서 공연하여 우리 가락의 우수성과 국위선양에 이바지하였다. 전남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광주시립국극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심청가 보유자로 지정되어 후진 양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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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판소리 "심봉사 황성 가는 대목" - 성창순(成昌順) 명창 2003년 11월 18일일시 : 2003년 11월 18일 오후 7시 30분 장소 : 시민교육관 경업당 문의 : 063-280-7000~1, 280-7006~7(공연기획팀) *선미숙 ㆍ전남대 예술대 국악학과 졸업 ㆍ조선대 교육대학원 졸업 ㆍ서울 전통예술경연대회 명창부 대상 ㆍ영광 법성포 단오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창부 대상 ㆍ미국 링컨 센터, 케네디 센터 등 국내외 공연 다수 ㆍ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이수자 ㆍ현재 전남도립국악단 창악부 단원 선미숙 전통소리 배움터 원장 대한민국 동부민요 보존회 강사 YWCA 민요교실 강사 *고수 이대휴 *해설 류장영(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장) ㆍ전남도립국악단 기악부 단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이신 성창순 명창 문하생들과 함께 합니다. 1.심청가 눈대목 : 심봉사 황성 가는 대목 *성창순(成昌順) 명창 :1934년 전남 광주 출신으로 명창 성원목(成元睦)의 장녀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방창 하는 천재였다. 부친은 성창순의 장래성을 인정하고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보통학교를 졸업할 즈음 춘향가·흥보가·심청가 세 마당을 이수했다. 1954년 김연수ㆍ김소희ㆍ정응민ㆍ박녹주ㆍ정권진 명창에게 사사 하였으며, 강산제 심청가ㆍ김세종제 춘향가ㆍ박녹주제 흥보가를 완창하고, 수궁가․적벽가도 사사하여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섭렵한 명창이다. 판소리 뿐 아니라 서예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 1966년 제5회 신인예술전 서예부 특선을 수상하였고, 1968년에는 국전 서예부에 입선하는 대단한 솜씨를 자랑하였다. 판소리 기량은 장족으로 성숙하여 1968년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고, 1978년에는 전주대사습대회에 참가하여 판소리 부문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또 1982년에는 제1회 KBS 국악대상, 1994년 화관문화훈장을 수상하는 등 여류명창으로서 그녀의 명성은 높아졌다. 1977년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졌고, 이어 1979년에는 춘향가 완창발표회를, 1981년 제1회 국악제 심청가 완창발표회를 가짐으로서 그 실력을 과시하였다. 성창순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1974년 재일거류민단 주최 광복 30주년 기념공연에 참여하여 일본 대도시 순회공연 및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에서 공연하여 우리 가락의 우수성과 국위선양에 이바지하였다. 전남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광주시립국극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제 제5호 심청가 보유자로 지정되어 후진 양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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